개울 건너 논으로 들어가려면 옆 필지를 가로질러야 합니다. 이십 년쯤 전 부친이 옆 땅 주인과 계약을 맺어 지나다닐 권리를 얻었고, 개울에 걸칠 다리는 그쪽이 자기 돈으로 세우고 손보기로 했습니다. 올여름 큰비에 다리 상판이 내려앉았을 때 옆 땅은 이미 다른 사람 명의였습니다. 새 주인은 자기가 한 약속이 아니라며 수리를 거절합니다. 민법은 이 다툼에 꽤 분명한 답을 두었고, 동시에 새 주인에게도 빠져나갈 문 하나를 열어 두었습니다.
앞 주인이 한 약속을 왜 새 주인이 떠안나
조문이 그렇게 정했습니다.
민법 제298조는 계약으로 승역지 소유자가 자기 비용으로 지역권 행사를 위한 공작물을 설치하거나 수선할 의무를 진 경우, 승역지의 특별승계인도 그 의무를 부담하도록 했습니다. 매매나 증여로 땅을 넘겨받은 사람이 여기서 말하는 특별승계인입니다. 상속인은 고인의 지위를 통째로 이어받으니 따로 적을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보통의 계약이라면 이렇게 되지 않습니다. 약속은 약속한 사람만 묶는 것이 원칙이고, 땅을 산 사람이 앞 주인의 채무까지 사들이지는 않습니다. 제298조가 이 원칙에 예외를 둔 까닭은 지역권의 성격에 있습니다. 통로나 다리는 사람과 사람이 아니라 땅과 땅 사이의 관계여서, 주인이 바뀔 때마다 의무가 끊기면 권리가 껍데기만 남기 때문입니다.
승역지와 요역지
편익을 내주는 땅이 승역지, 편익을 받는 땅이 요역지입니다. 이 글에서는 다리가 놓인 옆 필지가 승역지, 논이 요역지입니다. 지역권은 요역지 소유권에 붙어 함께 옮겨 다니고, 요역지와 떼어 따로 팔 수 없습니다.
어떤 약속이어야 매수인에게 넘어가나
아래 네 가지가 한꺼번에 맞아야 합니다.
| 요건 | 뜻 | 빠지는 예 |
|---|---|---|
| 계약으로 정한 의무 | 설정 계약이나 뒤이은 합의서에 적힌 것 | 가끔 봐 주겠다는 말뿐인 호의 |
| 승역지 소유자의 비용 | 돈을 대는 쪽이 옆 땅 주인 | 자재비는 논 주인이 내고 일손만 빌린 경우 |
| 지역권 행사를 위한 공작물 | 다리, 통로 포장, 배수관처럼 그 권리를 쓰는 데 필요한 시설 | 옆 땅 주인 자기 창고로 가는 진입로 |
| 설치 또는 수선 | 새로 놓거나 고치는 일 | 통행료를 깎아 주겠다는 돈 약속 |
세 번째 줄에서 다툼이 자주 납니다. 다리를 논 주인만 쓰는지, 옆 땅 주인도 함께 건너는지에 따라 성격이 흐려집니다. 함께 쓰는 시설이라면 제300조의 비용 분담이 겹쳐 들어옵니다.
약정의 폭도 봐야 합니다. 놓아 주기만 하기로 했는지, 놓고 보수까지 맡기로 했는지는 계약서 한 줄로 갈립니다.
매수인은 그 약속을 어디서 알 수 있었나
등기부입니다. 다만 거기 적혀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부동산등기법 제70조는 승역지 등기기록에 지역권설정 등기를 할 때 설정 목적, 범위, 요역지와 함께 민법 제298조의 약정을 기록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 약정은 등기원인에 그 약정이 있을 때만 올라갑니다. 설정 계약서에 수선 의무를 써 넣고 그 계약서를 원인으로 신청해야 을구에 한 줄이 생깁니다.
약정이 빠진 채 땅이 팔렸다면 사정이 복잡해집니다. 새 주인은 등기부만 보고 샀으니 그런 짐이 있는 줄 몰랐다고 맞섭니다. 실무에서는 등기에 오른 약정이어야 새 소유자에게 주장하기 수월하다고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논 주인이 가장 먼저 할 일은 승역지 등기사항증명서를 떼어 을구의 지역권 칸을 읽는 것입니다.
새 주인이 이 짐을 내려놓을 길은 없나
있습니다. 땅 일부를 내주면 됩니다.
제299조는 승역지 소유자가 지역권에 필요한 부분의 토지소유권을 지역권자에게 위기해 앞 조의 부담을 면할 수 있다고 정합니다. 위기(委棄)란 그 부분의 소유권을 넘겨 버리는 일입니다. 다리가 걸친 개울가와 통로 띠를 논 주인에게 넘기면, 그때부터 다리를 고칠 사람은 논 주인 자신이 됩니다.
새 주인에게는 셈의 문제입니다. 수선비가 해마다 나가는데 통로 부분 땅값이 크지 않다면 넘기는 편이 이득입니다. 반대로 그 띠가 필지의 유일한 출입구라면 떼어 주는 순간 나머지 땅의 쓰임이 줄어듭니다.
말 한마디로 끝나지도 않습니다. 부동산 소유권이 옮겨 가는 일이라 제186조에 따라 등기를 마쳐야 효력이 생기고, 그 부분을 떼어 내는 분할 측량도 거쳐야 합니다.
주의
위기는 승역지 소유자가 고르는 길입니다. 논 주인 쪽에서 땅을 넘겨 달라고 요구할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넘겨받은 뒤에는 수선비를 스스로 대야 하므로, 받을 땅의 상태와 다리 보수 견적을 먼저 맞춰 보십시오.
고쳐 주지 않고 버티면 무엇을 하나
차례대로 밟습니다.
- 승역지 등기사항증명서와 설정 계약서 사본을 모아 수선 의무가 적힌 곳을 표시합니다.
- 무너진 상태를 날짜가 남게 촬영하고, 보수 업체 두 곳 이상에서 견적을 받습니다.
- 새 주인에게 기한을 정해 수선을 요구하는 내용증명을 보냅니다.
- 응하지 않으면 수선 의무의 이행을 구하는 소를 내고, 판결이 나면 대체집행을 신청합니다.
다리 보수는 누가 해도 결과가 같은 일입니다. 민법 제389조 제2항은 이런 작위 의무를 채무자의 비용으로 제삼자에게 시키는 길을 열어 두었고, 민사집행법 제260조가 그 절차를 정합니다. 같은 조 제2항에 따라 필요한 비용을 미리 내라는 결정도 함께 신청할 수 있습니다.
모내기를 앞두고 당장 다리가 필요하다면 판결까지 기다리기 어렵습니다. 먼저 고치고 비용을 받아 낼지, 임시 처분을 거칠지를 사안에 맞춰 골라야 합니다.
이런 땅을 사려는 쪽은 무엇을 봐야 하나
확인할 것
· 을구에 지역권설정 등기가 있는지, 요역지가 어느 필지인지
· 그 등기에 민법 제298조의 약정이 적혀 있는지
· 현장의 다리, 통로, 배수관을 누구 돈으로 놓았는지
· 매도인에게서 설정 계약서 원본을 넘겨받았는지
· 최근 몇 년 사이 수선 요구나 분쟁이 있었는지
지역권이 붙은 땅은 시세보다 싸게 나오곤 합니다. 싼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값에 앞으로 들어갈 수선비가 녹아 있는지 따져 봐야 합니다.
매매계약서 특약에 공작물 수선 의무를 이어받는다는 사실과 그동안의 보수 내역을 적어 두면, 나중에 매도인에게 할 말이 생깁니다. 꼭 사야 하는 땅인데 짐이 무겁다면 위기라는 선택지를 처음부터 계산에 넣어 둘 수도 있습니다.
정리
앞 주인이 계약으로 떠안은 다리 설치와 수선 의무는 땅과 함께 새 주인에게 넘어갑니다. 지역권이 땅과 땅의 관계라서 주인이 바뀔 때마다 끊기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약정이 등기부에 올라 있는지가 실제 다툼의 무게를 정합니다. 새 주인은 통로 부분 땅을 넘겨 짐을 벗을 수도 있습니다.
수선을 거절당했다면 등기부와 계약서부터 맞대어 보고, 사진과 견적을 남긴 뒤 변호사와 함께 이행 청구와 대체집행의 순서를 잡아 보시기 바랍니다.
참조 조문
민법 제186조, 제292조, 제298조, 제299조, 제389조 · 부동산등기법 제70조 · 민사집행법 제260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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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
지역권 등기 없이 계약서만 써 두었습니다.
지역권도 부동산에 관한 물권이어서 계약만으로는 물권으로서 효력이 생기지 않고 등기가 있어야 합니다. 계약 당사자였던 앞 주인에게는 약속을 근거로 다툴 수 있지만 새 주인에게 주장하기는 훨씬 어려워지므로, 지금이라도 등기가 가능한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새 주인이 통로 땅을 넘기겠다는데 거절할 수 있나요?
민법 제299조는 승역지 소유자가 위기로 부담을 면할 수 있다고만 적고 지역권자의 동의를 요건으로 두지 않았습니다. 다만 소유권 이전 등기와 분할 측량에 비용이 들므로, 그 비용을 누가 낼지와 넘겨받을 범위를 서면으로 정리해 두셔야 합니다.
제 논을 팔면 다리를 쓸 권리도 넘어가나요?
지역권은 요역지 소유권에 붙어 함께 이전하는 것이 원칙이고 다른 약정이 있으면 그에 따릅니다. 논을 사는 분께 승역지 등기 내용과 수선 약정을 함께 알려 주시면 거래 뒤 다툼을 줄일 수 있습니다.
수선 대신 돈으로 받을 수도 있나요?
새 주인이 수선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 손해가 생겼다면 그 손해의 배상을 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다리가 계속 필요하다면 대체집행으로 실제 공사를 하게 하는 편이 실익이 크므로, 견적과 피해 내용을 함께 정리해 어느 쪽이 나은지 비교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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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검토: 한병철 변호사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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